[단상] Verification 대 Validation

[단상] Verification 대 Validation

용어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전문가들이 자신의 논거를 확실하게 주장하기 위하여 용어를 엄밀하게 정의하여 사용하고, 때로는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학자들도 학문적 교류를 위해 용어를 통일하기 위해 애쓴다. 기술의 세계에서도 용어를 중시한다. 어떤 기술적인 문서 또는 책자에서도 본론에 앞서 거의 예외 없이 용어 정의, 약어 설명 등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은 용어가 해당 문서, 책자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런데, 학문이든지 기술이든지, 어떤 경계를 벗어날 때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경계”라는 낱말은 “한계”, “울타리”, “구획”, “지경” 등 여러 뜻으로 쓰일 수 있다. “경계를 벗어날 때”의 “경계”의 자리에 “한계”, “울타리”, “구획”, “지경” 등을 선택한다고 해도 특별히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한계”란 끝을 표현하는 데 유리하고, “울타리”란 물리적 형태 연상에 유리하고, “구획”이란 건축, 토지 설계 등의 표현에 유리하고, “지경”이란 큰 땅덩이의 표현에 유리하다. 유사한 뜻이므로 교환하여 사용할 수 있지만 이렇게 어감의 차이가 있듯이 특정한 학문 또는 기술 분야의 경계를 벗어난 용어의 의미는 서로 의미나 쓰임새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외국어인 경우,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진다. 학문이든지 또는 기술이든지 앞선 이론 또는 앞선 기술을 가진 외국 전문가가 새로운 개념의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 그 개념에 대응되는 마땅한 우리말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자국어를 가진 어엿한 나라가 학문 또는 기술 용어를, 외국어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여러 이유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글 용어를 발굴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감 또는 표현의 선호도 때문에 한 용어를 다른 용어보다 앞세우는 다툼 또한 불가피하다.

이는 대체로 번역 문제와 궤를 같이 한다. 일반적으로는, 한 저자의 책을 여러 전문가가 공동 번역하는 것보다는 한 전문가가 번역하는 것이 일관성 측면에서 그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데, 외국 용어를 한글 용어로 바꾸는 일도 이와 유사성이 있다. 비록 최초의 선택이어서 의미를 담기에 다소 부족함이 있는 용어라도 최초 전문가의 수고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만 있다면, 이후 좀 더 적합한 한글 용어가 등장할 때 일관성을 갖고 수정할 수 있겠고,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세월과 함께 깊이를 더해가는 발전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술 번역이란 얼굴 없는 번역이고, 전문가들의 용어 선호도 차이는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복수 용어의 동일 무대, 동시 등장은 불가피하다. 어떤 방식을 거쳤든지 간에 일단 등장한 용어를 퇴장시키는 일은 만만치 않다. 대다수의 여론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용어만을 바라보거나,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지 결과만 만들면 된다는 쪽으로 기울기 때문에 용어의 통일은 부차적이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떤 막강한 권력이 개입하여 강제로 하나의 손을 들어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문제가 끝나지는 않는다. 대다수의 실무자들은 서로 다른 용어 또는 부적절한 용어로 혼란을 겪느니 차라리 원어 쪽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한글 용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한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글 용어에 대한 불신 또는 차별은 원어 의존성을 더욱 강화하게 되고, 그것은 또 다시 한글 용어와 번역의 불신으로 돌아오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한글 용어의 부실화와 한글 번역의 저질화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서론이 길어졌다. 원래 용어의 선택에 주목하여 시작한 글이지만, 그렇다면 용어 선택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의미는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는지를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과 밸리데이션(validation)이라는 용어와 필자의 실수 경험을 통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과거, 필자가 품질 보증 부서에 몸담고 있었을 때는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은 “검증”, 밸리데이션(validation)은 “확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 같다. 현재, 의료기기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은 “검증”으로, 밸리데이션(validation)은 “유효성확인”으로 하거나, 영어 발음 그대로 “밸리데이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다른 전문 분야에서는 아마도 또 다른 한글 용어를 선택하여 사용할 것이다.

한글 용어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과 밸리데이션(validation)이라는 영문 용어의 정의가 바뀐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은 설계/개발 수명주기의 특정 단계에서 설계/개발 출력 결과가 해당 단계의 입력 요구사항에 적합한지를 확인하는 평가 절차이고, 밸리데이션(validation)은 최종 설계/개발 결과물이 사용자 요구사항과 사용 목적에 적합한지를 확인하는 평가 절차를 말한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은 제품을 올바르게 만들었는지(building the product right)를 확인하는 활동, 밸리데이션(validation)은 올바른 제품을 만들었는지(building the right product)를 확인하는 활동이라고 부연 소개되기도 한다.

필자는 지난 수십 년간, 이러한 정의에 따라 V&V(Verification and Validation)의 두 용어를 구분하여 사용하였고, 심지어 반드시 구분하도록 강조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과거에는 사용자 요구사항 중 몇 가지 중요 규격을 택하여 확인하는 테스트 과정을 시스템 시험이요, 밸리데이션 활동이라고 인식하고 수행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그 두 용어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동일한 활동이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과 밸리데이션(validation)에 동시에 포함될 수도 있다는 사실, 밸리데이션(validation)이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을 대리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졌었다.

사실, 명확히 구분되는 적용 사례를 충분하게 많이 소개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과 밸리데이션(validation)의 정의를 실제로 이해하는 일은 실무 담당자에게는 혼동되는 일일 것이다. 정의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고, 또한 설계/개발 단계 모형을 놓고 설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제3자, 특별히 규제 당국의 품질 심사원에게 실제로 이 두 활동을 구분하여 자료로써 입증하는 일은 너무나 막연한 일이다. 해당 품질 심사원이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과 밸리데이션(validation)의 용어 차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큰 문제 없겠지만, 만일 필자처럼 거기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이라면 설득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포수 모형이든지 V자형 모형이든지 개발 모형을 놓고 곰곰이 생각해보면(아래 그림 참조) 모든 것이 자명해진다. 사용자 요구사항(user needs)은 설계/개발의 입력 조건이고,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은 중간 단계의 입력/출력 확인이며, 밸리데이션(validation)은 최종 단계의 사용자 요구사항 확인이다. 밸리데이션(validation)이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을 감싸는 구조이다. 화살표로 대응되는 관계에만 주목하기보다 전체 설계/개발 과정을 감싸고 있는 활동이 밸리데이션(validation)이고, 전체 설계/개발 과정 내에 포함되어 있는 활동이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이라는 사실에 착안한다면,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과 밸리데이션(validation)은 포함 관계이며, 전자가 후자에 포함되는 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 나면 허무하지만, 왜 어떤 경우 동일한 시험처럼 보이는 것이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에 포함되기도 하고 밸리데이션(validation)에도 포함되기도 하는지, 베리피케이션(verification)처럼 보이는데 왜 어떤 경우에는 그것을 밸리데이션(validation)이라고 말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바로, 밸리데이션(validation)이란, 마지막 단계에서 사용자 요구사항의 충족 여부를 확인하는 활동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 요구사항으로부터 비롯된 설계/개발 과정 전체를 포괄하는, 좀 더 큰 범위의 활동이 밸리데이션(validation) 활동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림) FDA의 설계/개발 모형

2020년 2월 11일 최종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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